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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ER "SCRYMO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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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함께 해 온 KUNTAC이라는 닉네임...

그리고 새로 함께 할 이름 JELLYMON 또는 SCRYMONSTER...

다(多)명인가 무(無)명인가, EDM Producer 임홍준을 만나보았다.




KUNTAC's 음악적 노도의 시기


KUNTAC은 90년대 우리나라의 대명절 설날과 추석이 되면 지금은 자료화면으로나 볼 수 있는 그 숨막히는 고속도로 위, 20시간 이상씩 걸리는 귀향길 속에서 부모님의 노래를 반강제로 들었다.


"박인희-세월이가면, ABBA, ToTo, The Beatles, Don mclaren의 Vicent, 조수미의 가곡"


밤하늘 달을 멍하게 쳐다보며 끝없는 밤길을 내달리면서 들었던 부모님의 노래들로부터 음악인생이 시작된것같다.


KUNTAC이 음악에 매니악해진 것은 중학교 시절이다. 세살 터울의 형은 CypressHill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HIP HOP과 같이 대중적인 음악도 접했다.


하지만 KUNTAC의 가슴을 울린 음악은 중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당시 하루 종일 틀어 놓은 Mtv채널에서 나오는 Limp Bizkit의 Nookie라는 트랙에 꽂히게 되었고 그때 당시 형으로 부터 생일선물로 받았던 Limp Bizkit 2집의 CD와 Sony의 CD Player는 그와 영혼의 단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Limp Bizkit의 2집 Nookie 트랙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하도 많이 들어서 CD 뒷편에 줄이 그어져있다고...

중학교 시절 우리나라 힙합 1세대 드렁큰타이거에 완전히 심취해서 3집을 거의 통으로 외워 버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xzibit - Paparazzi 의 instrument 를 어디서 구하거나 KUNTAC은 열정 이상의 노력들을 힙합에 쏟았다.


한 번은 다른 이의 MR에 랩 가사를 써서 학예회 무대를 빌려 짝사랑에게 고백도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 거절 당했던 웃픈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도 짝사랑한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 젖은 가사노트를 채워나갔다.


KUNTAC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껴오며 큰 변화 없이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학생 KUNTAC은 그의 인생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큰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KUNTAC이 만난 친구는 실제로 힙합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더 많은 커뮤니티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던 점은 그 친구는 이미 프로였다는 점이다.

그는 직접 가사를 쓰고, MR이라 불리는 힙합비트를 제작하고, 공연을 이어 오고 있었다.


"내 비트를 직접 만든다?"


비트를 직접 만든다는건 먼 이야기일 줄 알았던 KUNTAC, 그 후로 KUNTAC은 그 친구에게 찰떡같이 붙어 비트메이킹을 전수 받았다.


음악을 듣고 만드는 가슴 뛰는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방에 박혀 음악만 듣고, 혼자 무언가 궁시렁 대는 모습이 부모님 눈에 영 달가울 수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와 사춘기 어린 KUNTAC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서로 부딪혀 부분적인 타협을 했는데,


그 조건은 바로 “클래식 작곡 전공”


설득 당했다고 해야 할까..그래도 이루마나 유키구라모토 같은 뉴에이지 음악들 또한 즐겨 치면서 시간을 보냈기에 큰 거부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클래식... 그게 무엇인지 조차 그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에게 음악적인 재주는 사실 전혀 없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음치다.

음을 맞게 소리를 내지도 못 하지만, 그의 선생님의 말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음감이 없었다고...

하지만 컴퓨터로 작곡을 하는 요즘 시대에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던 그는 클래식 과에 작곡 전공으로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청음시험이 없는 학교를 고르는 잔재주를 부리면서..)

그렇게 부모님께서는 진심을 보시고는 만족하셨다.


음악에 편견이 없던 그는 그 동안 입시곡만 주구장창 쓰면서 그동안 가둬 둔 음악 세계를 알리고자 음대 개학 이래 처음으로 1학년 신분으로 연주회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바흐나 베토벤 고전 음악의 작곡법을 베이스로한 입시곡들의 법칙(?)을 뒤로 한 채 낭만주의 멘델스존이나 인상주의 드뷔시까지의 화음들을 차용해서 작곡을 하는데,


학과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담당 교수로부터는 혹평을 받았다.


"야..홍준아 음악이 너무 카페나 쌀롱에서 나오는 음악같아 너무 예쁘기만 하잖아!"


그때 당시 학교에서는 현대음악이라고 하는 음악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피아노 연주를 주먹으로 친다든가, 건반이 아닌 그랜드 피아노 내부 현을 직접 긋고 퉁기며 연주를 하는 등 독창적(?)인 연주법이 강요되고는 했다.


(돌이켜 보면 교수님은 학과 시절에는 조금 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창의력을 키워나가길 바라신 듯 하다.)


나는 남이 들어주지 않는 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주변인들과 나누기에는 점수에만 급급한 동기들을 보고서 학교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2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자퇴서를 내고 군대를 갔다.


물론, 부모님과의 상의는 없었다.



'음악'과 '운동'에 심취했던 K-ARMY 'KUNTAC'


그는 '공익'이었다.

지금의 내 몸을 보면 '공익' 판정에 대해 시시비비가 갈린다.

그가 공익 판정을 받았던 당시를 설명하면 이러하다.


옛날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허약체질이었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공을 던지고 나면 오른쪽 어깨가 항상 뭔가 불편했다.

오른쪽 어깨는 뭔가 고무줄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왼손으로 오른팔을 앞으로 쭉 잡아당기면 쭈욱 늘어났다.

고등학교때 비트 만드는 법을 전수해준 절친과 동반입대를 약속하고 의경을 알아보던 중

담배 사러 나간 동네 편의점에서 만난 학창시절 친구가 공익요원이라더라

이유를 물으니 "뭐 무슨 탈구?"라 묻길래 이런 건가?하고 친구에게 항상 하듯 오른팔을 앞으로 쭉 잡아당기면서 늘려 보이니 가만히 지켜보던 친구가 말해주었다.


"너 공익이야"


그렇게 의경을 알아보던 나는 공익이 되었다.


근데 그렇게 인생이 쉽고 즐겁기만 할리 만무하지 특히 KUNTAC의 인생은 뭐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었다.

그는 정보부(국정원)에 공익요원 배치를 받으며 퇴근과 사무업은 커녕..

3교대 산속 초소에서 군복을 입고 충성! 을 외치며 선임의 빨래와 생활관 청소를 하면서 공익생활을 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두번째로 인생에 영향을 준 인물과 시간을 만나게 된다.


군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 중 하나가 '재활 트레이닝'을 전공하다 입대한 선임이었다.


어깨 재활을 도와주던 선임으로 시작한 '웨이트 트레이닝'산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보고 듣고 읊던 '음악'

지금이야 사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도 잘 되어 있고, 핸드폰도 지급되는 군대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예전으로 돌아가면 군대라는 곳은 정말 할 것, 볼 것, 놀 것이 없는 곳이다.

어느 정도면 책을 안 읽던 사람도 어디 가면 거들떠도 안보는 '좋은생각' 이라는 소책자도 재밌다고 읽고 있는 곳이 군대란 이야기다.


KUNTAC이 가지고 있는 어깨 탈구를 재활로써 잡을 수 있다는 선임 덕분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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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NTAC은 군생활 당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같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로부터 14년뒤인 2022에도 매일같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줄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다른 시간들은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 하는게 전부였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존재 하지도 않았고 물론 핸드폰은 초소에 가지고 올라갈 수 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책과 검수를 받은 mp3 정도였기에, 그는 근무 전날 이름도 모르는 뮤지션들의 앨범을 잔뜩 다운 받아서 mp3에 넣고는 초소에 올라 가는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과는 철저히 단절된 그 우주 같은 곳에서 그의 음악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오는 트랙을 만나게 된다.


리빙 레전드가 된 Tiesto와 Ferry Costen의 듀오 팀 Gouryella의 Ligaya 그리고 Gouryella 탈퇴 이후 솔로로 활동하고 있던 tiesto의 Kaleidoscope 앨범에 수록된 6번 트랙 “here on earth” Paul Van Dyk의 For an Angel과 ATB-Ecstacy등


그것은 Trance라고 하는 장르였고, 감성적인 화성과 멜로디에 강한 비트를 때려 넣는 EDM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굴하지 않고 삶에 강하게 저항해서 살아가는 느낌을 그들의 음악에서 받았다고 했으며,

그는 지금도 그런 의지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강한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게 매료되어 생각과 선택이라는 과정들 조차 잊은 채 EDM에 빨려들게된다.



당시 KUNTAC에게 깊은 영감과 전환기를 안겨 준 곡ATB-EcstasyGouryella-Ligaya

KUNTAC은 영감 그리고 심취에 멈추지 않았다.트렌스에 미쳤던 시절 그가 만든 음악이다.




NOONT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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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전역(소집해제)과 함께 KUNTAC은 작업실을 임대했다. 부모님의 지원이 있었다.


KUNTAC은 자신의 계획을 4장의 A4용지에 담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거금 천만원의 보증금 지원을 받았고 조그만 작업실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그 작은 작업실은 KUNTAC에게는 꿈으로 향하는 텔레포트였고, 놀이터였고 동시에 전쟁터였다.


3년간 그 작은 작업실에서는 조그만 음악소년이 KUNTAC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없으면 먼지조차 미동없는 우주의 공간같았고 스스로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기에 완벽했다”



이런저런 음악과 장르를 방황하다가 그렇게 오롯이 느낌에 집중해서 만든 음악 More’s Place 싱글과 Time Treveller 싱글을 29살이 되던 해에 Bonzai Pregressive라는 벨기에에 터를 둔 레이블을 통해 발매를 하게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자신을 이 씬에 발을 들여놓게 만든 Tiesto도 이 레이블을 통해 Single을 발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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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s place 싱글이 Beatport chill-out 장르차트에 Top10안으로 진입하기도 했고 그때 또한 본인에게 영감을 준 ATB라는 뮤지션이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more’s place 뜻은 누구나 마음속에서 갈망하는 각각이 그리는 세상 유토피아의 느낌을 만든 곡이라 했는데,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본인 소설에 섬으로 등장시킨 인물 “Thomas More”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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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비트 루츠 리믹스 콘테스트의 제출곡이 Chainsmokers에게 LIKE를 받았다



그는 그렇듯 무엇하나 대충인 법이 없으며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 한 성격에 싱글을 내고 나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Beatport의 remix 콘테스트들을 전투적으로 참여하면서 성장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0살이 되던 해 '블러디 비트루츠'가 주최한 비트포트 리믹스 콘테스트에서 무려 2등의 성과를 거머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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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NTAC NOONTIDE MUSICTHE BEAT



운명적? 선택적? 어쨋든 갈림길


KUNTAC에게는 6년 정도 교제한 아름다운 애인이 있었다.


당시 그는 여자친구의 지지와 조력 속에 음악적으로 성장은 있었지만, 음악이 아직 그의 배를 불려주고 있지는 못 했다.


30살이 지나가면서 서로 결혼을 약속한 시간은 다가오는데 현실적으로 방안을 마련 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옆에서 김밥이나 피자 따위를 먹으면서 행복하게 무한도전을 보고 있는 여자친구를 보고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예쁘고 순수한 20대 전부를 내게 줬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근사하고 좋은 곳에서 밥 한 끼 할 수 없는 제가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어요”


“마음 아픈 것은 일생에 일 년 남짓이겠지만 이렇게 앞으로도 함께 라면

즐거운 일 년이 힘든 일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이었습니다. 냉정하게 제 앞날에 인생을 걸어보라고 말 할 수 없었죠”


그는 애인에게 잠정적 이별 통보를 해두고, 슬픔을 마주 할 새도 없이 자신을 시험대에 세웠다.


이 음악이라는 놈이 나를 견인하게 하는가?아니면 나를 퇴행하게 하는가?인생 마지막으로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그 결과에 따라 정하자"이 음악의 길로 계속 갈 것인지 말것인지"

대한민국 평범한 남자들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신파다. 아마 꽤 많은 남자들이 이런 이유로 한 번 쯤은 이별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공감한다. 저 당시의 비참함과 아픔, 슬픔을 말이다.


그렇다. KUNTAC은 잠시 찾아온 전성기 이후로 수익적으로도 콘테스트 성적으로도 뭐하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음악이라는 것에 모든 정신과 노력, 시간을 투자하고 있음에도 좋은 결과가 없다면 자기 자신의 자질 문제라고 여겼다.


지금 조차도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저명한 뮤지션의 리믹스 콘테스트


음악 인생의 마지막 곡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영혼을 갈아 넣어서 라도 1등을 할 각오로 밤잠 없이 사흘 밤을 샜다고 한다..


결과가 만약 좋다면 그녀와의 연애도, 이 음악도 다시 잘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Hardwell - Arcadia(Kuntac Remix)그의 마지막 콘테스트 곡이다



「 눈물에 젖어버린 도화선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콘테스트에서 탈락 이후에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위해서 음악을 포기하고 현실적으로 계획해 나가기로...

하지만 여자친구에게 이런 생각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우리가 너무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만나와서 지금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니,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데이트를 하고 어떤 음식들을 먹고 시간을 함께 즐기면서 보내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알고 난 뒤에도 서로가 좋다면 그때 다시 만나자”


만날 때를 대비해서 혼자서 준비해나간다.


그래서 생각한 게 두 번째로 잘 하는 일인 웨이트 트레이닝이다.

실전으로만 쌓아온 지금 이론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그는 생각해낸 게 피트니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트레이너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전에도 운동하면서 몇 번의 제의를 받기는 했지만 남들을 납득 시킬 수 있는 이유도 없이 우물쭈물 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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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위한 선택을 해오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와있었어 그러니깐 지금부터는 반대로 살아볼래”



사람 앞에 나서는걸 극도로 꺼려하는 성격이지만 역경은 사람을 바꾼다고 했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참가를 신청했다.

머슬매니아에 참가를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뭐하나 쉬운게 없었다.


첫번째 상반기 대회에서는 병풍만서다 왔다고 한다. 그렇게 또 그는 계획에 없는 두번째 하반기 대회를 출전하고 하반기에서는 국내에서 2nd 라스베가스 대회에서는 top10정도의 성적으로 마무리를 하게된다.






이후 피트니스센터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졌고 기존에 제의를 받았던 곳에서도 흔쾌히 수락도 해주었다.

그렇게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찾아간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는 생각보다 더 준비기간이 길엇던 탓일까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긴 6년의 연애가 완전히 끝이 났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방향성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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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UNTAC은 피트니스 트레이닝씬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다)



'SCRYMONSTER'


SMIT가 그를 만난 것은 '눈물 젖은 도화선'을 다시 재정비했을 때였다.

그처럼 '눈물 젖은 도화선'을 정비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SMIT를 정비하고 있었다.

SMITER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립하고 그들을 찾아 나서다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인물이 KUNTAC이었다.


처음에는 '외모와 몸매가 수려한' 모델을 찾는 식이었다.

그렇게 소개받은 사람이 KUNTAC이었다.

앞서 KUNTAC의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보강하자면 음악에 대한 권태와 실패감으로 인해 직업적으로 시작한 것이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던 KUNTAC이다.

실제로 KUNTAC은 유명 피트니스 대회인 머슬 매니아 국내 대회에서 2등, 라스베가스 국제 대회에서도 TOP 10에 입상한 실력자다.


KUNTAC의 첫 만남에서 SMIT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SMIT의 이야기는 비범한 꿈을 가졌지만 잘 풀리지 않아 지금껏 세상에 내놓지 못한 브랜드 SMIT에 대한 이야기였다.

KUNTAC은 SMIT의 이야기를 조용하게 경청해주었고, 크지 않은 동작과 대답 하지만 진정성있는 눈빛으로 공감해주었다. SMIT를 이야기하던 중에도 그가 상당히 공감하고 있는 인상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후 알게 된 그의 역사를 들어보니 SMIT와 KUNTAC은 '눈물 젖은 도화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임홍준을 KUNTAC이라는 이름으로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이름으로 그를 소개할 차례다.


SCRYMONSTER



계속 사용하던 Kuntac에서 SCRYMONSTER로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

SCRYMONSTER가 음악, 운동 무엇 하나 집중하지 못 하고 살아오던 중 큰 사건을 하나 겪게 되었다.


프리다이빙을 즐긴 어느 날이었다. 즐겁게 프리다이빙을 즐기고 다음 날부터 이유 모를 어지러움증이 생겼다.


"피곤함?...그냥 현기증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갈 수록 어지러움증은 더 심해져 갔고 술이 만취한 것 같은 어지러움증이 24시간 그를 괴롭게 했다.


“제가 누워있어도 서있어도 앉아있어도 줄에 거꾸로 매달려서 시계 추처럼 움직이는 기분이었어요.

사람과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습니다.초점을 한 곳에 맞출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누워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유는 프리다이빙 중 이퀄라이징을 하는 과정에서 귀에 있는 전정신경계에 너무 큰 압력이 가해져 신경계 장애가 일어난 것이었다.


저 병을 진단하기까지 3~4곳의 대학병원을 전전한 뒤에 깨달았고, 처음 간 병원에서는 급성 청각 장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항상 유의하고 병원으로 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 인생을 함께 해오던 음악과 운동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SCRYMONSTER에게 절망적이고 지옥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도 운동도 평생해온 두가지 모두를 동시에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그를 대체 누가 환자로 바라봐주며, 누가 이해나 해줄까 싶었다.

그는 그때 남이라는 존재와 자기 자신과의 거리를 확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걱정한다고 한들 어차피 그들에겐 남이사일 뿐.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된 일상을 이어가던 중, 그에게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만들어주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 코비 브라이언트의 죽음 >

쌩뚱 맞겠지만 사실이다. 뉴스로 접한 그의 죽음이 병상에 누워있는 그를 일어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지금 죽음을 앞둔 상황도 아닌데 세상이 끝난 것처럼 누워있다니?”


이윽고 주변을 돌아보니 SCRYMONSTER 자기 자신은 이미 이 역경을 헤쳐나갈 모든 것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인지했다.


""제게는 몸이 아파도 쉴 수 있는 집, 회복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나를 보살펴주는 가족이 있었어요.

그리고 음악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순간 아직까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집 밖으로 걸어나가 다시 운동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의사가 이야기 해준 주의해야 할 점을 매순간 상기하면서

처음엔 20분도 하기 힘들었던 운동이었는데, 6개월 뒤에는 전처럼 다시 1~2시간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스스로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한 프리웨이트는 불가능했다.


이 시기에 그에게는 첫 번째 조카가 생겼는데 조카를 통해 그간 알지 못했던 세상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쉴 수 있을 때 쉴 수 없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아이들몸이 아파도 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아이들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세상에 맞서고 있는 아이들자신을 위한 노력조차 할 기회가 없는 아이들.

그는 그들을 지키고 보살피고 싶다는 마음에 이름을 SCRYMONSTER라고 지었다고 한다.

단어 뜻 자체로만 보면 그저 무서운 괴물이지만 옛 건축물 벽면에 그려져 있는 악귀로부터 건물을 지키는 가고일처럼 수호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의 인생 목표를 SCRYMONSTER 이름에 담았다고 한다.


몬스터 주식회사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캐릭터는 역설적으로 귀여운 곰돌이(?)로 그려져 있다.



정작 SCRYMONSTER는 정말 한없이 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음악 NEW AGE처럼 무공해 인간형이다.


SMIT's MUSE 'SCRYMONSTER'


SMIT가 이제 곧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얼마전 SMIT는 SCRYMONSTER와 의미있는 작업을 마쳤다.

화보촬영과 영상작업이었다.

우리의 영상은

#강하고 #빠르고 #흥미롭고 #섹시한 SMIT 브랜드 영상작업이었다.

SCRYMONSTER는 우리의 첫번째 브랜드 영상에 출연 외에 매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소중한 음원을 제공해주었다.

그가 출연해준 음원은 더할 나위없이 우리가 원하던 음원이었다.

말 그대로 힘이 넘치고 섹시했다.



SMIT BRAND VIDEO #001 : Music by SCRYMONSTER



SMIT는 같은 VIBE, 비슷한 HISTORY, 좋아하는 FEEL

그리고 그가 풍기는 특유의 선(善)함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많은 SMIT의 많은 역사가 SCRYMONSTER와 함께 이루어지길 고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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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NTAC's 1st SINGLE

More's Place


KUNTAC's 2nd SINGLE

Time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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